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从日本海沿岸的弥生时代村落出土的日本国内最长的船载铁器

自古以来人类活动的要地

 中尾遗址位于鸟取县中部的仓吉市。坐落在距日本海沿岸南下7公里左右的仓吉市大谷的低矮丘陵上,丘陵的南侧流淌着天神川的支流--国府川。其附近除了东前遗址和国分寺古坟,还有史迹伯耆国厅迹和史迹伯耆国分寺迹等重要遗址,说明此地在古代承担着重要的作用。

 中尾遗址随着工业园区的建设,在1991年进行了第一次发掘,并在2014-2016年进行了第二次发掘调查。共发现旧石器时代的石器和159个绳纹时代用于狩猎的陷阱、25座弥生时代的竖穴式建筑、21座干栏式建筑、2座古坟时代后期的古坟等。从而得知,人们曾长期在此地进行生产活动。另外,在2019-2021年进行的第三次发掘调查中,发现了11座弥生时代中期至古坟时代早期的竖穴式建筑,以及25座古坟时代中期至晚期的古坟。

 在第三次发掘调查中发现的弥生时代中期后段的竖穴式建筑里,出土了器型完整的铁矛1件,铁斧2件。铁矛应是从朝鲜半岛传入而来,全长约54.3cm,是目前日本国内出土的最长的铁矛。铁斧是经过敲击伸展而成的板状铁斧,以及把熔化的铁灌入范型(模子)里制作而成的铸造铁斧。板状铁斧是朝鲜半岛制作的,其长度27.5cm也属于目前日本国内出土板状铁斧中最长的一类。铸造铁斧则是中国制,长约11cm。

 日本列岛最早的铁器出现在弥生时代早期快要结束的时候。到了弥生时代中期,珍贵的铁器从大陆和朝鲜半岛陆续传入。铁器主要从北九州的权力者的墓中出土,如中尾遗址这般,从弥生时代的竖穴式建筑中一并出土了铁矛和铁斧,在日本仍无二例。

焚烧后遗留下铁器的竖穴式建筑

 有铁器出土的竖穴式建筑位于弥生时代中期后段聚落的西端附近。发现了6个直径约7米的用于支撑屋顶的圆形柱孔。作为当时较大型的竖穴式建筑,仅留有建筑骨架和屋顶,或许是因火灾被烧毁的。出土的3件铁器均发现于被烧毁的横梁和屋顶之下。其中铁矛处于倒下的状态,最初的状态应该是刀尖朝下立在柱子附近的地面上的。在同一根柱子的底部还发现了被刺穿的板状铁斧。发现铸造铁斧的地方位于离柱穴约50cm的位置。3件铁器均未发现手柄。

 从出土状况来看,此竖穴式建筑遭受火灾的同时,3件铁器均处于屋内。若火灾的原因是意外失火的话,应该会带着贵重的铁器跑到屋外。因此我们判断,当时的人们是为了祭祀或礼仪活动,故意将3件铁器放在屋内并将房屋烧毁。在日本国内其他地方并未发现将遗留有铁器的竖穴式建筑烧毁的例子。

 通过此次发掘调查,我们获得了很多新的启发。一直以来,铁器的分布中心位于北九州。但是同时期,在遥远的鸟取县发现的铁矛和铁斧,以及在处于内陆的中尾遗址中生活的人们持有铁器这一事实,迫使人们对以往铁器的普遍概念产生了新的认知。

 在北九州的聚落和大陆有很深的联系并积极进行贸易的时候,与中尾遗址相近的日本海沿岸聚落有可能不经过北九州就获得了来自大陆和朝鲜半岛的运输货物。这对于考察弥生时代铁器的流通路线尤为重要。并且,通过对有铁器出土的已烧毁竖穴式建筑的发掘,也为考察当时铁器的特点和使用方法提供了新的材料。(片岡启介)

从烧毁的竖穴式建筑中出土铁矛1件、铁斧2件

铁矛横放于柱子的底部,最初应该是刀尖朝下立在柱子附近。板状铁斧与手柄相连的一面插在柱子的底部,斧刃朝上。以上铁器在使用时都附有木质手柄,但在出土时并未找到。因为铁器只有装上手柄才可以使用,并且没有发现使用的迹象,所以这些铁器可能并没有被使用过。

遗址位置示意图

铁矛、板状铁斧、铸造铁斧(从左往右)

目前日本国内出土的最长的铁矛。和韩国的茶户里遗址出土的铁矛(约59cm)相似。矛身长且薄,应该不是实用器具。板状铁斧是日本国内最大级别的,韩国的茶户里遗址和勒岛遗址也有类似器物出土。铸造铁斧则是利用两枚模范制作而成。

遗址全貌图

1号坟

直径约22m的巨大古坟,周围环绕着14个墓穴。

有铁器出土的竖穴式建筑全貌图

被烧毁的竖穴式建筑(西半部)

东半部是第二次,西半部则是第三次调查的。从上往下,可以清楚看到构成建筑的横梁和椽子(从建筑物的中心向墙边呈放射状径向排列的框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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关东地区最大的村庄—-讲述着一万年前的故事

贝丘密集地带中最古老的贝丘

 史迹取挂西贝塚是位于面向东京湾的下总台地上的绳纹时代早期早段~前期前半段的村落。早期早段(约一万年前)的贝丘在全日本数量很少,在贝丘密集的东京湾东岸也是最古老的存在。自1999年以来,伴随着建筑开发进行的发掘调查,于2008年发现了数座有贝壳层的竖穴式建筑,从此备受瞩目。2009年到2022年,为了保护该遗址,我们进行了调查以确认其范围和内容。最终我们发现了50多个早期早段的竖穴式建筑,在以台地南部为中心,东西向约300m的范围内,这些竖穴式建筑沿着台地呈带状分布。这便是关东地区最大的绳纹时代早期早段的村落。

展示生活和精神文化的出土遗物

 在遗址东部发现的竖穴式建筑中,堆积着约70cm厚的贝壳层。建筑在废弃后,沉积了许多贝壳和骨头之类的食物垃圾。贝壳层中残存着野猪、鹿、狸、野兔、野鸡、野鸭、鲤鱼、黑鲷和沙丁鱼等动物骨头。在作为食物的鱼类和贝类中,99%以上的贝类是生活在半咸水(淡水和海水混合的地方)中的大和蚬,而鱼类则是生活在淡水和内湾的沿海地区,这表明捕捞是在比较广泛的水域进行的。此外,以野猪、鹿等为主,还有狸、野兔,鸡类、鸭类等多种动物的发现,也说明当时的物种极具多样性。在对出土的碳化种子和陶器上残留的种子压痕进行详细调查之后,我们发现当时就已使用胡桃揪等坚果类、灯台树等浆果类(果实水分多且柔软)、以及大豆属和红豆亚属等豆类。我们还在储存的坚果上发现了米虫的痕迹,说明当时的人们长期定居于此地。
我们在一处竖穴式建筑的贝壳层下发现了成堆的被火烧过的野猪和鹿的头骨。在四个野猪头骨聚集的地方,发现其中三个头骨在轴线上交错排列,另外一个与它们正交排列。这种奇特的发掘状况非常罕见,让人很难相信它们只是被丢弃了。这对于了解当时人们的礼仪制度和精神文化生活尤为重要。

 如前文所述,该遗址出土了丰富多样的,能够详细了解绳纹时代早期早段文化和精神生活的遗物,从另一层面讲,这是一个向我们叙说一万年前的人们是如何应对急剧变化地自然环境的宝贵文化遗产。(白崎智隆)

绳纹时代早期的竖穴式建筑上堆积而成的贝壳层

有贝壳层的绳纹时代早期早段竖穴式建筑集中于遗址东部,其年代也大体一致。

取挂西贝塚和东京湾

海老川在遗址以西的地方潺潺流过。据推测,大约一万年前的海平面比现在要低40m左右,海岸线也在比现在更远的位置,大概距离遗址有6km。

遗址全景(由东向西)

海老川的两条支流在狭小的台地上蔓延开来,东西细长,与山谷的海拔相差约15m。

竖穴式建筑分布图

大致分为3个时期,初期集中于遗址中部,随后转移至东部

米虫的压痕

在陶器表面的小孔上注入硅胶以取出模型,观察后发现是米虫。左图为硅胶模型,右图为显微镜图像

▲绳纹时代早期早段的贝壳

以大和蚬等生活于半咸水的贝类为主

▲绳纹时代前期前半的贝壳

以蛤蜊等海贝为主

贝塚贝壳的变迁

通过对比绳纹时代早期早段和前期前半的贝塚和贝壳种类,可以看出早期至前期,海岸线是如何慢慢接近到该遗址附近的。

动物骨骼聚集处

位于中央的野猪头骨的年龄从幼年到成年不等,且下颚骨也被去除。另外,经常被加工成骨角器的鹿角以原样的形式出土,这种情况并不多见。

野猪头骨(A、B)和鹿的头骨(C)

A是成年雄性,B是幼年。 A有烧焦的痕迹,可能是在骨头的状态下被火焚烧的。这只鹿的头盖骨的后脑勺也被切除。长:A40cm、B21.5cm、C12cm。

牙饰

使用阔口真鲨的牙齿制成。有直径约1~2㎜的小孔。宽约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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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丹波山地生活的旧石器人/京都府最初的环状石堆群

出土的石器可追溯到智人刚到达日本列岛的时期

 稚儿野遗址位于京都府西北部的丹波山,坐落在一个由两条河流汇合而成的小高地上。一直以来,此地的绳纹时代至平安时代的遗址被人们所熟知。但是随着9号线国道的开发工程而进行的发掘调查,我们发现了大约3万6000年前的人们所制作的约1500件石器。此年代是根据约3万年前的姶良火山灰和约5万年前的大山仓吉火山灰地层中出土的石器群,并且将石器的形状和制作方法与同时期遗址所出土的材料进行对比而得出的。相当于智人到达日本列岛不久之后的旧石器时代晚期前段。从出土的石器分布情况可以看出,这里可能是当时的村落或营地。

 出土的石器分为有明显加工痕迹的石器,以及制作这些石器时产生的大量石屑。前者多用于制作枪尖的刀形石器和切削各种物品的石核石器、刃部磨制石斧等。其中仅研磨了刀尖的刃部磨制石斧被用来伐木和狩猎,也证明这些石器属于旧石器时代晚期前段。制作石器的石料包括赞岐岩、角岩、黑曜石、页岩等。赞岐岩和黑曜石的产地并不在附近。赞岐岩生产于奈良县和大阪府交界处的二上山,黑曜石则是从遥远的岛根县隐岐诸岛运来的。学者们认为当时的人们利用水上走廊,也就是通过100米海拔内的濑户内海-日本海运送过来的。

在寒冷的气候中与各地的人们交流

 该遗址在大约几米的范围内发现了19处石器堆,并且未有石器出土的中央地区被石器堆包围。这种只在旧石器时代晚期前段出现的居住与石器制作共存的空间被称作“环状石堆群”。以关东地区为中心的区域内发现了很多这样的遗址,但是在近畿地区,这是目前为止除兵库县板井寺ヶ谷遗址以外发现的第二例。

 当时的气候比起现在更为寒冷,日本的海岸线也向着海中伸展。可以想象旧石器时代的人们在大面积针叶林覆盖下的绿水青山里广泛迁徙,有时成群结队,到遥远的二上山和隐岐诸岛猎取大型野兽,获取石器的石料。石器的形状和制作方法在近畿、北陆和东北地区的遗址中很常见也很相似。这次稚儿野遗址的发现,在解读旧石器时代晚期的人类在丹波山地区大范围移动和生产生活方面取得了巨大成果。(黑坪一树)

环状石堆群

因石器堆围绕成圆环状而得名。遗址中央几乎看不到石器,像广场一样空旷。理论上讲,这里可能是生产和交换石器的地方,或是举行盛大节日的地方,也有可能是缓和部落之间关系的地方。

②遗址远景:该遗址延伸到一个高地上,因此可以远眺丹波地区的山脉和流经于山谷的河流。当时虽然不像末次冰期最冷的时期(大约2.5万年前)那么冷,但是至少比现在是寒冷的,而且在各地也广泛分布着针叶树。

环状石堆群全体平面图

广场周围环绕着19个石器堆。这些石器堆可能是制作石器的场所,也有学者认为3-4个石器堆便是一个家庭。如果这样的话,可以推测此遗址是由20-30人组成的村落或营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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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에 제방을 만들어 달린 일본 최초의 철도

니시키에(錦繪)에 그려진 축제가 눈앞에

 사적 구 신바시 정차장지(舊 新橋停車場址) 및 타카나와 축제지(高輪築堤址)는 1872년에 신바시-요코하마(橫濱) 간에서 개업한 일본 최초의 철도유적이다. 1991년부터 실시된 발굴조사로 구 신바시 정차장과 플랫폼의 기초 등이 발견되었고, 1996년에 구 신바시 정차장지로서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신바시-요코하마 간 철도는 개업 당시에 현재의 타마치역(田町驛) 북쪽에서 시나가와역(品川驛) 남쪽까지의 2.7km를 바다 위에 제방을 만들어 그 위에 철로를 설치하였다. 이 제방을 타카나와 축제라고 한다. 종전에는 타카나와 축제는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는데, 2019년 시나가와역 개수공사에서 석축의 일부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제방 성토와 석축 등이 남북방향으로 길게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밝혀지고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축제는 성토로 제방을 만든 다음에 양면을 석축으로 보강하는 구조이다. 석축은 바다측의 경사도가 30도이고 산측은 거의 수직으로 쌓았다. 바다측 석축 최하단에는 폭 90cm의 장방형 기반석을 두고 그 위에 한 변 50cm 정도의 절석(切石)을 쌓아 올렸다. 개업시의 축제는 상면 폭 6m 이상, 최하단 폭 17.5m, 높이 4m가 안되는 정도의 규모로, 철로는 단선이었다. 기저면은 해수면보다 1m 가량 낮은 바다 속에 있고 바다측 석축 전면에는 연약한 지반을 보강하기 위한 말뚝열이 박혀 있었다. 1876년 복선화를 위해 축제를 확장한 흔적도 확인되었다. 또한 절석을 쌓아 만든 교대(橋臺)가 발견되었다(제7교량). 이는 도쿄만으로 배를 내보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며, 이 다리 위를 증기기관차가 달리는 모습이 니시키에(錦絵, 목판화)에도 다수 그려졌다. 이 외에 바다측 석축 위에서는 열차용 신호기를 세우기 위한 토대로 추정되는 돌출된 석축이 발견되었다.

일본의 근대화를 전하는 철도유구

 현재까지 타카나와 축제의 발굴조사에서는 쌍두(雙頭)레일과 레일을 지탱한 침목(枕木) 등이, 구 신바시 정차장의 발굴조사에서는 우표와 개찰가위 등이 발견되었으며, 그들을 통해 일본 최초의 철도가 부설된 무렵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현재 구 신바시 정차장은 JR 신바시역과 특별명승 및 특별사적인 구 하마이궁 정원(舊 濱離宮庭園) 사이의 거대 복합도시 ‘시오도메(汐留) 시오사이트’의 일각에 역 건물과 플렛폼이 복원되어 있다. 타카나와 축제지의 발굴조사는 2022년 4월 현재 진행중인데, 현재까지의 조사 결과 축제의 내부 구조와 구축 방법이 밝혀지고 있다. 이 성과는 일본에서 교통의 근대화와 토목기술 등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기 때문에 종전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었던 구 신바시 정차장에 더하여 새로 발견된 타카나와 축제의 일부를 2021년 추가적으로 ‘구 신바시 정차장지 및 타카나와 축제지’로서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平河内毅)

타카나와 축제의 제7교량 교대부

축제에 설치된 교량으로 신바시에서 출발하여 7번째 다리이다. 도쿄만으로 배를 내보낼 때 항로를 확보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여겨진다. 교대 사이의 폭은 6.8m이다.

하늘에서 본 타카나와 축제

구 타카나와 해안의 해안선을 따라 완만하게 곡선을 이룬다. 사진 안쪽이 시나가와 방면이다.

신호기 토대부(동쪽에서)

중앙에 보이는 높은 석축이 토대이다. 시나가와 정차장에서 신바시 방향으로 900m 지점에 있다. 신호기는 신바시-요코하마 간에 16곳이 설치되었다.

타카나와 축제의 내부구조(모식도)

축제의 중앙 최하단에 경질점토를 깔고 그 위에 실트질의 흙을 덮어 심재(芯材)로 하였다. 바다측(동쪽)은 특히 단단하게 점토, 롬토, 보강석 등을 단계적으로 쌓은 뒤, 석축 역시 단계적으로 쌓아 올렸다. 산측(서쪽)에서는 확장시의 성토와 석축도 확인되었다.

기차 토병

역에서 판매하는 도시락과 함께 팔던 차 용기이다. 철회(鐵繪)로 기차가 그려졌고 뒤에 ‘福’의 글씨가 있다. 구 신바시 정차장에서 출토되었다. 주구부를 포함한 최대 직경이 12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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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노 신앙(熊野信仰)을 지탱한 중세 해상교통의 거점

쿠마노천(熊野川)을 따라 배치된 다양한 구조의 지하식 창고

 신구우 시모혼마치유적은 키이반도(紀伊半島) 남동부를 흐르는 쿠마노천 하구에서 약 2km 상류 우안의 자연제방 상에 입지한다. 신구우는 태평양을 왕래하는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바로 인근에는 사적 쿠마노 삼산(熊野三山)의 하나인 쿠마노 하야타마대사(熊野速玉大社)가 모셔져 있으며 그 문전 마을로 발전하였다. 신구우시에서는 2015년 이래 몇 차례에 걸쳐 본 유적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죠몽시대부터 근세에 이르는 유구와 유물을 확인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이 중세의 항구와 관려된 유구이다. 선착장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쿠마노천에 면하는 입지와 창고군의 존재로 보아 중세 항구도시의 일부로 추정된다.

 확인된 유구는 굴립주건물, 방형 수혈건물, 석단통로(石段通路), 돌담장, 단야유구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항구도시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지하식 창고로 생각되는 방형 수혈건물이 30기 이상 발견되었다. 모두 한 변 2-3m의 규모로 굴립주, 토대, 석축 등 다양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구조 차이는 각각이 만들어진 시기 차이를 나타내며 15세기가 되면서 세가지 타입이 모두 만들어졌다.

 쿠마노천에 가까운 유적 북쪽은 15세기 이전에는 아직 강으로 내려가는 사면이 정비되지 않았으나, 지하식 창고가 가장 많이 축조된 15세기가 되면 사면지에 석축을 만들어 단상으로 부지가 조성되었다. 강으로 내려가는 석단통로가 만들어지고 단상 부지에 복수의 지하식 창고가 강을 따라 건설되는 등 계획적으로 도시가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유적 북동부의 단상 부지에는 단야유구가 밀집되어 있으며, 배못이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배 수선 등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유구 배치는 계획적으로 정비된 중세 항구도시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동서 각지와의 교류를 나타내는 다수의 유물

 출토유물은 수입 도자기, 토코나메야키(常滑燒), 세토야키(瀬戸燒), 비젠야키(備前燒), 하지키(土師器) 냄비(남이세계 南伊勢系, 하리마형 播磨型), 야마자완(山茶碗), 와기(瓦器) 등 다양하며 키이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서 각지와의 활발한 교류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세토야키의 촛대와 화병, 동제 육기완(六器碗, 밀교 법구의 하나로 6개 한 세트) 등의 종교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쿠마노 하야타마대사를 비롯한 신사와 절과의 밀접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중세에는 쿠마노 신앙이 융성하여 쿠마노 장원(荘園)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각지의 쿠마노 산령(熊野山領)에서 장원미(荘園米)가 반입되면서 수운이 발달되며 쿠마노 삼산의 재정을 지탱하였다. 본 유적에서 확인된 항구 관계 유구는 그러한 물류의 실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이 신구우 시모혼마치유적은 중세 항구도시의 구조를 이해할 수 있고, 종교 세력의 융성을 배경으로 한 중세시대 태평양 교통의 실태를 해명하는데 있어서 귀중한 유적이다. (小林高太)

유적 원경(북서쪽에서)

유적의 동쪽으로 탄카쿠산(丹鶴山)이라 불리는 소구릉이 쿠마노천에 뻗어 있어 풍파의 영향을 받기 어려워 항구로 적합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유적 위치도

유적의 바로 남쪽에 쿠마노 하야타마대사와 아스카왕자지(阿須賀皇子址)을 잇는 쿠마노 참배길이 지나고 있다. 쿠마노 하야타마대사까지 불과 0.5km이다.

유적 전체도 (번호는 사진과 대응)

창고군(서쪽에서)

쿠마노천에 면한 단상 부지에 줄지어 건설되었다. 원주 모양은 조사 전에 있던 초등학교의 기초말뚝 이다.

백자사이호

중국제로 이부(耳部)에 ‘李丁’이라는 각명이 있다. 높이 32cm이다. 카마쿠라시대(鎌倉時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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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카시대(飛鳥時代) 유력호족의 절, 그 옆에서 군아 정창(郡衙正倉) 발견

폐기된 탑 심초석이 출토

 오바네폐사지는 시즈오카시 시미즈구 오바네(静岡市 清水區 尾羽)에 있는 고대 사찰지이다. 이 지역에 오래된 사찰이 있었다는 사실이 에도시대(江戸時代)의 기록으로 확인되어 2014년부터 간헐적으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금당과 강당이 발견되었다. 나라현 아스카촌(奈良縣 明日香村)의 사적 카와하라사지(川原寺址)와 동일한 계통의 문양을 가진 기와가 출토되어  아스카시대(7세기 후반)에 창건된 유력한 호족의 우지데라(氏寺, 특정한 씨족에 소속된 절)로 추정된다. 1992년에는 탑 최상단의 지붕 위에 설치한 노반(露盤)이 농지를 경작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2019년 시의 도로 확장 작업에 따른 금당 서편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초석으로 추정되는 석재 세 개를 확인하였다. 이 중 하나는 길이 111cm, 폭 85cm, 두께 58cm로, 상면이 평편하고 중앙에 직경 약 34cm, 깊이 11cm의 구멍이 파여져 있었다. 이러한 특징으로 초석 중에서도 탑 중앙에 세운 심주(心柱)를 지탱한 ‘탑 심초석’으로 추정된다. 확인된 위치는 가람 가장자리에 가까운 저지대로,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사찰이 폐기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근방에서 12세기 경에 해당되는 토기가 출토되는 점으로 미루어 그 무렵에는 이미 폐사가 되었고, 불필요한 초석과 함께 심초석 역시 폐기된 것으로 여겨진다. 노반이 발견된 위치가 금당 동쪽이기 때문에 종전에는 탑 역시 금당 동편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그러나 탑 심초석의 출토지가 금당 남서쪽이기 때문에 탑이 금당 남편에 있었고 탑,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으로 배열된 가람배치였을 가능성이 부각되고 있다.

군아 정창(郡衙正倉)으로 추정되는 초석건물

 2016년도부터 2020년도에 걸쳐 국도1호선 고가도로 건설에 따라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금당 동남편 구역에서 기단을 수반하는 초석건물과 구가 확인되었다. 키나이(畿内)지방 외의 지역에서 고대 초석건물이 건축된 것은 사찰과 관아에 한정되는 점, 과거 조사에서도 이 근방에서 고상건물이 발견된 점, 건물 부근에서 탄화미(불탄 쌀)가 집중 출토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이 건물이 나라시대에 설치된 스르가국 이하라군아(駿河國 庵原郡衙)의 정창(공적인 창고)으로 추정된다. 기단 주변에 죠와(承和)5년(838년)의 화산 폭발로 퇴적된 ‘코즈시마 텐죠산(神津島 天上山) 화산재’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축조는 그 이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탄화미의 연대측정 결과와 출토유물로 보아 이 정창이 9세기 초에 건설되었고 10세기에 소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창 북편에서 확인된 구는 동서 일직선으로 파여져 있고, 구 내부에서 나라시대로 추정되는 목간 4점이 출토되었다. 고상건물과의 위치관계를 볼 때 구는 군아 내부 공간을 구획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조사 결과로 보아 아스카시대에 건설된 유력 호족의 절 인근에 나라시대가 이르러 군아가 설치되었고, 그 일대가 군내를 다스리는 정치적 거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배후에는 사찰을 만들고 나중에 군사(郡司)로 임명된 재지 유력 호족의 존재가 엿보인다. (小泉祐紀, 勝又直人)

폐기된 탑심초 출토상황

상면 중앙 직경 34cm의 구멍은 심주와 조합하기 위한 장부구멍이다. 장부구멍을 중심으로 직경 70-80cm로 얕게 패여 있는 부분이 있어 심주의 직경을 추정할 수 있다. 측면은 그다지 가공되지 않은 부정형한 사각형이다. 무게는 820kg이다. 탑 심초석 옆으로 또 다른 초석이 보인다.

조사구 배치도

나라시대에 들어 사원의 동쪽에 군아가 조성되었다고 추정된다.

군아의 정창 (남서쪽에서)

지반 개량공사를 한 뒤에 건물의 토대가 되는 기단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구조의 군아 정창은 토카이(東海) 지방에서 첫 사례이다. 기둥의 간격은 도리칸 8척(약 2.4m), 들보칸 7척(약 2.1m)이다.

수막새와 암막새

오바네폐사의 추정 가람구역에서 출토되었다. 수막새는 문양을 만들 때 사용된 나무틀의 목리가 보인다. 수막새의 직경은  상 16.5cm, 하 17cm이다.

목간의 적외선사진과 석문

앞면에는 ‘丈部’, ‘矢田部’, 뒷면에는 ‘丈部’, ‘矢田部’, ‘物部’ 등의 성을 가진 9명의 이름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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埋蔵文化財保護対策委員会
回答内容

(公印省略)   
広文振  第787号
令和5年2月22日

一般社団法人日本考古学協会
埋蔵文化財保護対策委員会
委員長 山 田    康 弘 様

広島市長   松 井  一 實
(市民局文化振興課)  

 

史跡広島城跡一帯における文化財の総合的な保存・活用に関する要望について(回答)

 

令和5年1月27日付け埋文委第9号で要望のありました件について、次のとおり回答いたします。

 

1 現在進められている広島城三の丸歴史館の建設場所および三の丸跡の整備計画について文化財および歴史的景観保護の観点から再検討を行うこと。

(回答)

 広島城の魅力向上事業は、浅野氏広島城入城400年記念事業を契機とする歴史・文化の発信拠点としての関心の高まりや、旧広島市民球場跡地へのイベント広場等の整備、中央公園広場へ のサッカースタジアムの開業など、広島城を巡る環境や人の流れが大きく変化することが見込まれることなどを背景として、歴史・文化の発信拠点、また観光拠点としての広島城の魅力の向 上を図るものであり、このうち広島城三の丸の整備については、令和元年度から令和3年度までの検討を経て、現在、整備事業として推進しています。
 広島城三の丸の整備の検討に当たっては、「史跡広島城跡保存管理計画」(昭和63年4月策定) や、その具体的な展開を図るための整備の指針として、三の丸エリアにサービス・管理ゾーンを配置することなどを示す「史跡広島城跡整備基本計画」(平成元年3月策定)も踏まえており、 その具体的な成果として、令和2年5月には、「広島城基本構想」を策定しました。
 「広島城基本構想」は、同基本構想の2ページの記載のとおり、広島城(以下、この項において「広島城区域」を指します。)全体と広島城区域を構成する各エリアの基本的な考え方を示しながら、「史跡広島城跡整備基本計画」で示された方向性のうち取組が十分に行われていない事項や優先的に推進すべき事項を抽出するとともに、「史跡広島城跡整備基本計画」では詳細に示されていない「三の丸」の施設整備や最新技術の活用、ソフト面の取組等に関する方向性を示すなど、今後の取組の基本的な指針として策定することとし、あわせて、史跡広島城跡に関する保 存活用計画の策定に向けた検討を行うこととしたものです。
 「広島城基本構想」の策定に当たっては、令和元年10月以降、「広島城のあり方に関する懇談会」において意見交換を行い、令和2年2月から3月にかけて市民意見募集を行いました。また、「広島城基本構想」において広島城への来訪者の「おもてなし拠点」を目指すとした「三の丸」については、令和3年7月、新たな機能導入の方針並びに整備計画及び管理運営に係る基 本的な条件を定めた「広島城三の丸整備基本計画」を策定しました。
 「広島城三の丸整備基本計画」の策定に当たっては、アストラムライン路線や共同溝等の地下の既存施設等の状況、整備予定のペデストリアンデッキの位置、近世における建物等の配置状況も想定しつつ、展示収蔵施設となる「広島城三の丸歴史館」の配置計画を設定しており、前述の「広島城のあり方に関する懇談会」において公開で意見交換を行い、令和3年5月から6月にかけて市民意見募集を行っています。
 その後、「広島城三の丸歴史館」の詳細については、「広島城の展示整備に関する懇談会」にお いて公開で意見交換を行い、令和4年1月に「広島城展示等基本計画」を策定しました。
 こうした過程を経て検討を終了し、広島城三の丸の整備のうち、Park-PFIを活用した 三の丸にぎわい施設の整備に関しては、令和3年12月に、事業者の選定に関する事項を審議する審議会を設置するための条例改正を市議会本会議において全会一致で議決され、広島城三の丸歴史館の整備に関しては、令和4年3月に、公の施設としての設置・管理に関する条例制定を同じく全会一致で議決されており、こうした手続を経て、現在、それぞれ整備事業として推進しているものです。
 「広島城三の丸歴史館」は、近世の広島の歴史及び文化並びに広島城の歴史に関する博物館施 設です。現在、施設の1階、総合ガイダンス展示において、かつての三の丸がどのような場所であったかを分かりやすく紹介する展示を行う予定としています。
 要望書にある「広島城三の丸歴史館の建設場所」及び「三の丸の整備」については、令和3年度までの間に、有識者を始め広く意見を頂きながら丁寧に検討を行った上で、市議会の承認を得て「建設場所」を決定し、整備事業として推進しており、今回の要望書の御指摘を踏まえた再検討を行うことは考えていません。
 なお、要望書では、「史跡広島城跡保存管理計画」において「史跡広島城跡に付随したものとして追加指定し、保存を図る必要がある」とされている旨の記述がありますが、これは「広島城三の丸歴史館の建設予定地」に関する記述ではありません。したがいまして、「史跡追加予定地である三の丸」とあるのは誤認であることを申し添えます。

 

2   史跡広島城跡とその周辺区域を含む文化財の総合的な保存・活用に関する計画を策定した上で、 関連事業との調整を行い、具体的な事業を進めること。

(回答)

 「史跡広島城跡保存管理計画」及び「史跡広島城跡整備基本計画」は、策定から既に30年以上が経過しています。この間、史跡広島城跡を巡る環境や人の流れ、社会情勢なども変化してきており、新たな課題なども生じつつあります。このため本市では、令和3年度から「史跡広島城跡保存活用会議」を開催し、有識者の意見を聴きながら「史跡広島城跡保存管理計画」の内容をベースに、新たに「史跡広島城跡保存活用計画」として取りまとめる作業を進めています。
 現行の「史跡広島城跡整備基本計画」では、史跡広島城跡が広島のまちづくりにおいて果たす基本的な役割として、①歴史としての広島城跡、②緑としての広島城跡、③景観としての広島城跡を挙げ、「広島城跡が単独で発揮する役割として捉えるのではなく、都市的な視点で周辺の諸機能とのネットワークを図ることによって、より魅力的なものとすることが重要である」としていました。このことは、史跡広島城跡整備の課題が、文化財的な観点からのみで解決されるものではなく、「一つの整備内容を提示するにも関連する事項を十分把握するなど、多方面からのアプローチが必要となる」ことを念頭に置いたものです。
 「史跡広島城跡保存活用計画」の策定に当たっては、こうした考えを踏まえ、史跡広島城跡の本質的な価値を改めて明確にするとともに、これまでに策定した個別の分野別計画や関連計画を整理し直した上で、令和5年度中に同保存活用計画を策定することとしています。
 同保存活用計画策定後は、整備の基本的方向とその具体化について体系的に整理し、整備を総合的かつ計画的に進めるための指針として「史跡広島城跡整備基本計画」の改訂作業に着手していくことにし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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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고분시대의 공간, 분화로 피해를 입은 마을

대울타리로 둘러싸인 지역 수장의 거점시설

 카나이 시모신덴유적은 ‘갑옷을 입은 고분시대인’이 발견되어 주목 받은 카나이 히가시우라유적(金井東裏遺蹟)의 남쪽에 인접하고 있다. 화산 폭발로 인한 화쇄류와 토석류가 퇴적되어 형성된 선상지의 말단부에 위치하며 동쪽은 높이 약 20m의 단구 절벽이다. 2014-2017년의 국도 우회도로 건설공사에 따른 발굴조사로 발견되었으며, 카나이 히가시우라유적과 마찬가지로 6세기 초 분화한 화산재로 덮인 취락이다.

 분화 이전의 취락은 건물의 유무와 종류에 따라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북 조사구 북쪽 부분으로, 울타리로 나누어진 구획 내에서 밭, 소규모 제사유적, 평지건물군(지표면을 그대로 바닥으로 한 건물)이 확인되었다. 둘째는 중앙에서 북 조사구에 걸친 장소로, 작은 규모의 토기 집중구와 분화 이전에 폐기되어 거의 매몰된 수혈건물군이 확인되었다. 셋째는 남 조사구로, ‘울타리 유구’와 그 주변에서 제사유구군이 확인되었다. 주목되는 것은 남 조사구에서 발견된 ‘울타리 유구’이다. 현재까지 고분시대 유력자의 거점적 시설로 구와 담장을 이용하여 방형 구획시설을 설치하고 내부에 건물을 계획적으로 배치한 유구가 많이 발견되었다. 대울타리를 방형으로 돌린 이 ‘울타리 유구’는 바로 그 조건에 걸맞는 것으로, 지역 수장의 거점시설로 추정된다.

단야공방과 피해를 입은 아이와 말

 북 조사구에서는 울타리 구획 내부에서 6기의 평지건물이 확인되었다. 화산재가 건물 내 바닥면에 직접 퇴적되어 있는지 여부로 분화 당시 지붕의 유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6기 중 4기는 지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지붕이 없고 이미 해체되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1기의 건물에서 단야로가 발견되어 단야공방이 평지건물이었음이 밝혀졌다.

 울타리 밖에서는 분화 이전에 폐기되어 매몰된 수혈건물의 내부에 쓸려 들어간 상태로 8살과 11살 전후의 아이 2명과 망아지 2마리, 암컷말 1마리가 발견되었다. 망아지와 암컷말의 존재로 보아 본 유적에서 말 번식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모두 아이와 함께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말 사육에 아이가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8살 전후의 아이는 곡옥과 관옥으로 된 목걸이를 착용하였다.

거점시설 안팎에 산재하는 제사유구

 남 조사구의 ‘울타리 유구’는 한 변 약 54m의 평행사변형 공간을 높이 3m의 대울타리로 둘러쌓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울타리는 화산재 위에 쓰러진 상태로 탄화되었으며, 분화 당시에는 서 있던 것이 화쇄류가 직격하여 쓰러졌음을 알 수 있다. ‘울타리 유구’ 내부는 담장에 의해 다시 동서로 나누어진다. 서쪽 구획에는 굴립주건물 1기와 기단 모양의 원형 성토 1기가 확인되었고, 남서 및 남동 모서리에서 소형 왜경(倭鏡)과 방패형 석제모조품이 출토되었다. 동쪽 구획에서는 한 변 9m의 대형 수혈건물, 일반적인 수혈건물, 굴립주건물 각 1기, 그리고 밭유구가 발견되었다. 이 건물들 바닥면에는 화산재가 직접 쌓여 있었고 의도적으로 뽑힌 것으로 보이는 기둥, 대들보 등의 건축 부재, 그리고 그 흔적들이 화쇄류 속에 남아 있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아 이 건물들은 분화 당시에 이미 지붕이 없는 상태로 해체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제사유구는 ‘울타리 유구’ 북쪽 바깥에 1개소, 남쪽에 6개소가 발견되었다. 모두 ‘울타리 유구’와 관련되는 것으로 추정되며 제사용 토기와 철제품, 검과 농공구 등을 모방한 석제모조품 등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유구마다 토기와 석제모조품의 종류, 수량, 철제품의 유무, 분포 양상 등에 차이가 있다. ‘울타리 유구’ 남쪽의 굴립주건물 가운데 1기에서는 모자곡옥이 출토되었다. 모자곡옥은 건물 내 바닥면에 다수의 구옥(臼玉)과 함께 놓여 있었는데, 바로 위에 화산재가 쌓여 있었던 점, 화쇄류 속에 기둥 흔적이 있었던 점 등으로 보아 이 건물에 지붕이 없었고 기둥만이 서 있었던 상태로 제사를 치루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루나산(榛名山) 동록 지역은 6세기에 두 번에 걸쳐 폭발한 화산 분출물에 뒤덮인 고분시대 취락의 구체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전국에서도 드문 지역이다. 6세기 초의 화산재 밑에서는 카나이 히가시우라유적과 나카수지유적(中筋遺蹟) 등이 발견되었고, 6세기 중엽의 분화로 대량의 경석이 쌓인 코모치야마(子持山) 남록에서는 사적 쿠로이미네유적(黒井峯遺蹟)과 시로이유적군(白井遺蹟群)이 조사되었다. 이 유적들은 화산 분출물로 매몰되어 다른 지역에서는 결코 남아 있지 않는 고분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과 재해 후에 취한 대응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고분시대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카나이 시모신덴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에서는 지역 수장의 거점시설의 자세한 구조와 주변에서 이루어진 제사의 구체적 모습이 밝혀졌다. 발굴된 지역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땅 속에는 고분시대 지역 수장을 둘러싼 공간이 아직 화산재 밑에 남아 있다. (小島敦子)

대울타리 출토 상황

1.8m간격의 각목 기둥에 아지로(網代, 식물을 삿자리 무늬로 엮어 만든 구조) 패널을 붙인 구조이다. 2매의 아지로 사이에 발모양의 구조재를 끼우는 3중 구조로 그것을 4-5단의 횡목으로 고정하고, 식물 줄기로 결속하였다. 재료는 기둥은 밤나무, 아지로는 벼과 초본식물과 대나무아과, 결속재는 포도속이다.

대울타리 추정 복원도

목걸이를 착용한 어린이

8세 전후로 성별은 알 수 없다. 1-2세의 말(성별불명)과 함께 재해를 입었다.

유적 원경(동쪽에서)

하루나산의 북동쪽 기슭에 펼쳐진 선상지에 위치한다. 하루나산의 분화구에서 8km떨어진 유적까지 화쇄류가 덮쳤다. 하늘색의 비닐 시트가 보이는 곳이 카나이 히가시우라유적으로 카나이 시모신덴유적과의 거리는 약 600m이다.

유적 전체도

남측은 ‘울타리 유구’와 제사유구군, 북측은 평지건물군으로 그 사이에는 건물이 없다.

화쇄류에 의해 매장된 어린이 한 명과 말 두마리

좌측의 말은 약 2세로 성별불명, 우측의 말은 3-4세의 암컷이다. 그 사이에 11세 전후의 어린이가 있다.

사람의 발자국과 말발굽 흔적(서쪽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화쇄류가 몰려들기 전에 사람과 말이 함께 동쪽으로 피난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북측과 남측의 조사구 화산재 상면에서 확인되었다.

‘울타리 유구’와 주변의 유물 출토상황

‘울타리 유구’ 외부의 남측에서 특히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소형 왜경과 석제모조품의 출토 상황

대울타리 기둥과 가까운 안쪽에서 출토되었다. 바로 밑에는 대형의 검형 석제모조품 2점이 묻혀 있었다. 가까이에 굴립주건물과 기단 모양의 원형 성토가 위치하고 있어, 제사구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검형 석제모조품

소형 왜경의 아래에서 출토되었다. 길이 좌 6.3cm, 우 5.6cm이다.

소형 왜경

‘울타리 유구’ 조영에 있어 지진을 위해 매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직경 6.2cm이다.

제사유구A

지붕이 없는 굴립주건물에서 모자곡옥을 비롯하여 하지키, 수에키, 철기, 구옥 등이 출토되었다. 모자곡옥은 상단 일부를 깨트렸으며, 그 파편도 출토되었다.

제사유구B

대형의 고배형기대 및 다수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수에키의 고배형 기대(★)는 발부와 대각부가 분리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제사의 최종 단계에서 발부를 분리하는 행위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철촉(좌 2점)과 철부

크기가 크고 제작방법이 실용품과 다른 점으로 보아 제사용으로 추정된다. 왼쪽부터 길이 14.3cm, 17.5cm, 15cm이다.

석제모조품

제사유구C

손으로 빚어 만든 토기, 하지키, 철기, 석제모조품, 구옥 등이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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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際交流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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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죠몽문화(續繩文文化)와 고분문화가 혼재된 남북의 교류지점

두 가지 타입의 토광묘

 북토호쿠(北東北) 지방에서 고분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에 대해서는 불명확한 부분이 많아 ‘역사의 공백’이라 할 수 있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아오모리현 시치노헤마치에 있는 이노하나(1)유적에 대한 조사 성과에 의해 고분시대 전기의 아오모리현 지역이 북쪽에서 내려온 ‘속죠몽문화’와 남토호쿠(南東北) 이남에서 올라온 ‘고분문화’의 두 가지 요소가 복잡하게 혼재하는 지역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이노하나(1)유적은 아오모리현 동부, 핫코다산(八甲田山) 동쪽 기슭에서 오가와라호(小川原湖)로 흐르는 츠보천(坪川) 중류지역, 표고 20m 가량되는 대지의 연변에 입지한다. 2018년과 2019년에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고분시대 전기의 토광묘 6기가 발견되었다.

 토광묘 평면형은 모두 타원형이지만 속죠몽문화 특유의 ‘주공형 구덩이’와 ‘주머니형 구덩이’가 있는 4기(A군)와 그것이 없는 2기(B군)의 두 타입으로 나누어진다. A군의 무덤에서는 속죠몽토기와 함께 고분시대의 고식 하지키(古式土師器), 철제품, 유리제 소옥(小玉) 등이 출토되었고 B군의 무덤에서는 고식 하지키와 각종 구슬류가 출토되었다. 이와 같은 무덤 타입과 출토유물의 조합으로 볼 때, A군은 속죠몽문화와 고분문화의 양쪽 요소가 혼재하며 B군은 고분문화 요소가 강한 것을 알 수 있다.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지는 사람들의 교류

 ‘주공형 구덩이’와 ‘주머니형 구덩이’를 수반하는 속죠몽문화계의 무덤은 현재까지 아키타현 노시로시(秋田縣 能代市)의 사무가와Ⅱ유적(寒川Ⅱ遺蹟)과 이와테현 모리오카시(岩手縣 盛岡市)의 에이후쿠지야마유적(永福寺山遺蹟) 등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이 유적들에서는 이노하나(1)유적의 B군과 같은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외에 본 유적에서는 공헌용으로 추정되는 고식하지키의 영향을 받은 속죠몽토기가 다수 출토되었다. 그러나 고식하지키는 고분문화권에서 반입된 것이 아니라 현지 생산 가능성이 있다. 속죠몽문화의 요소와 고분문화의 요소가 일체화되어 이 지역에 뿌리내렸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벽옥제 산반옥(算盤玉)과 북방에서 반입되었을 가능성 있는 호박제 환옥(丸玉) 등 희소한 구슬류가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피장자 중 이 지역의 유력자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시기는 다르지만 본 유적의 인근에는 137점의 세형관옥이 출토된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중기의 후나바무카이카와쿠보(2)유적(舟場向川久保(2)遺蹟)과 20기 중 17기의 토광묘에서 구슬류가 출토된 고분시대 중기의 모리가사와유적(森ヶ澤遺蹟)이 있다. 장기간에 걸쳐 희소한 구슬을 입수할 수 있었던 유력자의 계보를 엿볼 수 있다.

 금번의 발견으로 고분시대의 시작 시점부터 고분문화의 요소가 혼슈(本州) 북단의 아오모리현 지역까지 미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노하나(1)유적 주변은 서로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교류하며 영향을 주고 받은 북과 남의 문화교류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향후 제지인들에 의한 고분문화의 수용 양상과, 고분문화계인들이 북상해 온 이유 등에 대한 연구가 기대된다. (木村高)

토광묘군의 전경(북서에서)

흰선으로 테 둘러진 유구가 토광묘이다. 왼쪽 4기가 A군, 오른쪽이 B군이다. 서로 다른 두 타입의 무덤이 반경 6.5m정도의 좁은 범위 내에 밀집하여 있다. 안쪽으로 보이는 충적지와의 표고차는 약 8m이다.

토광묘군의 분포

주변에는 헤이안시대(平安時代)의 수혈건물과 구덩이, 근세시대의 굴립주건물과 우물 등이 중복되어 있다.

이노하나(1)유적 원경(동쪽에서)

서쪽 1.5km지점에 모리가사와유적이 보인다.

A2토광묘

장축 양단에 주공형 구덩이, 오른쪽 주공형 구덩이 옆에 주머니형 구덩이가 있다. 주공형 구덩이에 기둥을 세워 상부구조를 설치하고, 주머니형 구덩이에는 부장품을 매납한 것으로 추정된다. 홋카이도(北海道)의 이 시기 속죠몽문화계 토광묘에서 출토된 인골은 다리를 구부려 옆으로 눕힌 것이 많다. 토광묘의 길이는 162cm이다.

A1출토의 속죠몽토기

소형 토기는 부장용으로 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대형 토기는 실생활 또는 장송의례의 자비 과정에서 그으름이 부착되었다. 뒷 줄 오른쪽 토기 높이 16.9cm이다.

B1 토광묘

붉게 칠해진 고식하지키의 고배와 구슬류가 출토되었다. 고배는 배신만 출토되었고, 대각은 B2에서 출토되었다. 토광묘의 길이는 152cm이다.

B1・B2출토 고배

배신은 B1, 대각은 B2에서 출토되었다. 잔존 높이 13.8cm이다.

B1출토 구슬류

벽옥제・녹색 응회암제・활석제의 관옥, 벽옥제의 산반옥, 호박제 환옥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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国際交流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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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해(동해)측의 야요이취락에서 국내 가장 긴 박재 철기 출토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활동이 이어진 요지

 나카오유적은 톳토리현 중부의 쿠라요시시에 위치한다. 일본해(동해) 연안에서 7km 정도 남쪽으로 떨어진 쿠라요시시 오오타니(大谷)의 낮은 구릉상에 입지하며 구릉의 남쪽으로 텐진천(天神川)의 지류인 코우천(國府川)이 흐른다. 인근에는 히가시마에유적(東前遺蹟)과 코쿠분지고분(國分寺古墳), 사적 호우키 국청지(伯耆國廳址), 사적 호우키 코쿠분사지(伯耆國分寺址) 등 각 시대의 중요한 유적이 집중되어 있어 당시 이 지역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말해준다.

 나카오유적은 공업단지 조성에 의해 1991년에 제1차, 2014-2016년에 제2차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구석기시대의 석기와 죠몽시대의 수렵에 사용된 함정 159기, 야요이시대의 수혈건물 25기, 굴립주건물 21기, 고분시대 후기의 고분 2기 등이 확인되어 긴 세월에 걸쳐 사람들이 활동한 장소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2019-2021년에 실시된 제3차 조사에서는 야요이시대 중기에서 고분시대 전기에 걸친 수혈건물 11기, 고분시대 중기에서 후기에 걸친 고분 25기 등이 확인되었다.

 제3차 조사에서 발견된 야요이시대 중기 후엽의 수혈건물에서는 완형 철모 1점과 철부 2점이 출토되었다. 철모는 한반도에서 반입된 것으로 보이며, 길이 54.3cm로 국내에서 출토된 철모 중 가장 길다. 철부는 철을 두드려서 늘려 만든 단조품의 판상철부와 녹인 철을 거푸집에 흘려 넣어 만든 주조철부로, 판상철부는 한반도제로 추정되며 국내최대급으로 길이 27.5cm, 주조철부는 중국제로 보이며 길이 11cm이다.

 일본열도에서는 야요이시대 전기 말경에 철기가 출현하였으나, 대륙과 한반도에서 반입된 철기는 야요이시대 중기가 되어도 매우 드물고 귀중했다. 철기의 출토는 북부 큐슈(九州) 유력자의 무덤 부장품이 주를 이루며, 나카오유적과 같은 수혈건물에서 철모와 철부가 함께 발견된 예는 야요이시대 유적에서는 유일하다.

철기를 그대로 둔 채 수혈건물을 소각

 철기가 출토된 수혈건물은 야요이시대 중기 후엽에 해당되며 취락의 서쪽 끝 인근에 위치한다. 수혈건물은 직경 약7.5m의 원형으로 지붕을 지탱하는 기둥구멍 6개가 발견되었다. 당시의 수혈건물로는 큰 편으로 화재로 소실 된 것으로 보이며, 불에 탄 구조물과 지붕재가 남아있었다. 3점의 철기는 모두 불 타 쓰러진 들보와 지붕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철모는 원래 기둥 근처의 바닥에 꽂혀서 세워져 있었던 것이 쓰러진 것으로 보인다. 판상철부 또한 같은 기둥의 아랫부분에 꽂혀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주조철부는 기둥구멍에서 50c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3점 모두 자루는 발견되지 않았다.

 출토상황으로 미루어 수혈건물이 화재로 소실될 당시 3점의 철기는 건물 내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는데, 화재의 원인이 실화일 경우 귀중한 철기를 건물 밖으로 반출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추정해 볼 때 3점의 철기는 의도적으로 건물 내에 남겨진 채 제사나 의례를 위해 건물을 불태웠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다. 철기를 그대로 둔 채 수혈건물을 불태우는 예는 전국적으로 발견된 예가 없다.

 금번의 발굴조사에서는 박재철기 분포의 중심이 북부 큐슈였던 시기에 멀리 떨어진 톳토리현 내륙인 나카오유적이라는 취락에서 철모와 철부를 보유하였던 것을 알 수 있었고, 기존의 철기 보급 상황을 재검토 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북부 큐슈의 취락이 대륙과 깊은 관계를 갖고 왕성한 교류를 하던 시기에 나카오유적과 관련이 있는 일본해(동해)연안의 취락은 북부 큐슈를 통하지 않고 대륙과 한반도로부터의 박재품을 취득했을 가능성이 있어 이것은 야요이시대 철기 유통루트를 생각할 때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철기들이 불에 탄 수혈건물에서 출토된 점은 당시 철기의 성격과 이용방법을 생각하는데 있어 새로운 자료이다. (片岡啓介)

불 탄 수혈건물에서 출토된 철모 1점과 철부 2점

철모는 기둥 아랫부분에 가로로 놓여진 채 발견되어 꽂혀서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판상철부는 자루에 부착하는 쪽이 기둥의 아랫부분에 꽂혀 있고 날이 위를 향하고 있다. 모두 목제 자루를 부착하여 사용하는 것이지만 발견 당시 자루는 확인되지 않았다. 철기 자체에도 사용 흔적이 보이지 않아 자루를 장착한 본래의 사용법으로 이용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유적 위치

철모・판상철부・주조철부 (왼쪽부터)

철모는 야요이시대 출토품 중 국내에서 가장 길다. 한국 다호리유적 출토 철모(약59cm)와 유사하다.

길고 크지만 날이 얇아 실용품은 아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판상철부는 국대 최대급으로 한국 다호리유적, 늑도유적 출토품과 유사하다. 주조철부는 2매의 거푸집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유적전체도

1호분

직경 약 22m의 가장 큰 고분은 주위가 14기의 묘광으로 둘러싸여 있다.

철기가 출토된 수혈건물 전체도

불타 무너진 수혈건물(서쪽 부분)

동쪽 부분은 제2차, 서쪽 부분은 제3차에서 조사되었다. 위에서 보면 건물을 구성하는 대들보와 서까래(건물의 중심에서 벽측을 향해 방사상으로 늘어선 골조)의 배치를 잘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