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사이성지, 키사이성 무사 저택지(사이타마현 카조시) 전국시대~에도시대초기(15세기 중엽~17세기 초) 騎西城址・騎西城武家屋敷址(埼玉縣 加須市) 戦国時代~江戸時代 初期(15世紀中頃~17世紀初頭)

호조(北条)씨 최전방의 성,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과의 격전지

 키사이성지, 키사이성 무사 저택지는 관동평야 중앙을 흐르는 토네강(利根川)의 범람원에 있는 카조저지(加須低地)에 형성된 낮은 구릉(표고 12m) 위에 입지한다. 키사이성은 전국시대에서 에도시대 초기(15세기 중엽~17세기 초)의 성으로, 1455년 코가 쿠보우(古河公方), 아시카가 시게우지(足利成氏)가 키사이군(崎西郡) 키사이성에 집결한 칸토관령(關東管領)을 공략하였다는 기록이 문헌상에 처음 등장한다. 전국시대후기 1563년과 1574년에는 오다와라 호조씨(小田原北条氏)의 성으로,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에 의해 침략당하고 불태워졌다. 1590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칸토에 진출하여 후다이(譜代, 대대로 섬기는 직접적인 가신)인 마쯔다이라(松平)씨와 오오쿠보(大久保)씨가 성주를 맡았으나, 에도시대 초기인 1632년에 폐성되었다.

 키사이성의 성곽부는 에도시대 초기의 그림에는 주위는 늪지로 둘러싸여 있으며, 혼마루(本丸)・니노마루(二ノ丸)・우마야구루와(馬屋曲輪)・텐진구루와(天神曲輪)・고노마루(五ノ丸)・로쿠노마루(六ノ丸)의 여섯개의 쿠루와(曲輪, 성을 구성하는 단위 구획)로 구성되어 있다. 전국시대에 해당되는 신뢰할 만한 그림은 남아 있지 않으나, 발굴조사에 의해 성의 일부가 개편된 것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는 1981년부터 80회 이상 실시되었으며, 1884년부터 13년간에 걸쳐 성곽부와 무사저택지 서편을 조사하였다. 해자・구・다리・우물・토광 등의 유구와 일상생활과 관련된 도자기류・칠기 등이 다수 확인되었으나, 이번에는 전쟁과 관련된 부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유구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격자형 해자(障子堀, 쇼지보리)이다. 해자의 바닥을 격자 모양으로 파서 장해 시설을 마련한 것으로 성곽의 주위와 그 남쪽(外堀)에 2중으로 둘러져있다. 격자형 해자는 호조씨과 관련된 성에서 많이 보이며 오다와라성(小田原城), 야마나카성(山中城) 등에서도 확인되었는데, 키사이성 고노마루의 남쪽에서 확인된 격자형 해자는 최대 폭 48m로 전국 최대급이다. 이토혼문서 ‘伊藤本文書’(東京大學史料編纂所 소장)에 1563년, 우에스기 켄신이 호조 우지야스・타케다 신겐(武田信玄)측에 포위당한 마쯔야마성(松山城)을 구원하기 위해 나섰으나, 때를 놓쳐 대신에 키사이성을 공략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본 유구는 그 무렵의 것으로 보인다.

 유물로 주목되는 것은 목가리개와 목가리개 장식이 남아 있는 투구이다. 이러한 투구가 유적에서 출토된 예는 매우 드믈어 전국적으로도 희귀하다. 둥근 발과 목가리개의 모양으로 보아 에치고(越後, 현재의 니이가타현)계로, 우에스기 켄신 쪽의 무장이 착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 외부 해자에서 말갑옷과 화승총의 부품인 용두가, 외부 해자의 남쪽에서 투구 장식이, 조사구 전역에서 총알 약 100점이 출토되었다. 유적내 넓은 범위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화승총을 사용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성곽의 남쪽 구역에서는 금화 3점과 금속 용유물이 부착된 토기가 출토되었다. 과학분석 결과 이 구역에서 무구와 장식의 소재가 되는 합금을 만드는 금속 생산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는 전국의 전국다이묘(戰國大名)의 성과 대도시에서도 확인된 것으로, 키사이성과 같은 소규모의 성에까지 보급된 실태를 보여주고 있다.

 키사이성은 저지에 입지하기 때문에 다종다양한 유물이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었다. 대규모의 격자형 해자와 투구, 금제 말 갑옷, 금제 투구 장식에서 최전방의 성에서 싸우는 찬란한 전국무장의 모습이 되살아난다. 전국시대에서 에도시대 초기에 걸친 성곽에서의 생활과 생업을 살피는데도 중요한 유적이다. (嶋村英之)

고노마루의 동쪽과 남쪽을 돌아가는 격자형 해자(북서에서/1989년)

고노마루의 동쪽과 남쪽을 돌아가는 격자형 해자(북서에서/1989년)

깊이 1m 가량 되는 해자 바닥을 다시 구상(내부에 칸막이를 만든 것도 있다) 또는 정방형, 장방형으로 1m가랑 파내려가 방어선을 높였다. 최대 폭 48 m는 전국최대급이다.

전국시대 후기(16세기 후반)의 세력도

전국시대 후기(16세기 후반)의 세력도

키사이성은 오다와라 호조씨와 에치고의 우에스기 켄신과의 세력 다툼의 최전선이었다.

격자 모양으로 정연하게 배열된 해자 내부(고노마루 남쪽)

격자 모양으로 정연하게 배열된 해자 내부(고노마루 남쪽)

키사이성 배치도(에도시대 초기의 그림으로 작성)

키사이성 배치도(에도시대 초기의 그림으로 작성)

격자형 해자는 성곽의 주위와 그 남쪽(外堀)에 이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고노마루 가장자리의 해자에서는 무기류인 투구・낫・재갈, 생활용구인 불탄 칠기와 나막신・나무통부재・탄화벼・수수・조・면, 주머니에 들어있는 동전 70장, 사람의 두개골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다리를 중심으로 석제원반 99점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적에게 던진 투석으로 추정된다.

쥬록켄스지 투구(十六間筋兜)

쥬록켄스지 투구(十六間筋兜)

목가리개와 목가리개 장식은 가죽 소찰 213매를 가죽끈으로 엮어 만들었다. 흑칠을 하였으며, 현재 가죽은 부식되고, 옻칠만 남아 있다. 정면에는 투구 장식을 세우기 위한 장식꽂이를 마련하였다. 이 무렵, 동국(東國, 칸토지방)에서 제작된 투구는 위에서 본 모습이 계란 모양이 일반적인데 반해, 이 유물은 원형으로 에치고계이다. 발은 앞뒤 폭 26.5cm, 가로 폭 21.2cm, 높이 15cm이다.

투구 출토상황

투구 출토상황

고노마루 가장자리의 격자형 해자 바닥에 놓여진 상태로 출토되었다. 대장급의 투구로 추정된다. 이 장소까지 우에스기측의 대장이 침입한 뒤 격투 중 흘린 것일 수도 있다.

말갑옷

한변 2.4cm의 소찰 140매를 천에 꿰매어 붙인 말갑옷이 접혀 쌓여진 상태로 출토되었다. 소찰은 가죽에 흑칠을 하고 표면에는 금박을 붙였다. 호조씨가 만든 군비 문서에는 “말에 금 갑옷을 입히라”라고 되어 있다.

腰刀(허리칼)

腰刀(허리칼)

2중의 격자형 해자 중간에 있는 구 바닥에서 출토되었다. 손잡이는 상어가죽에 금박을 붙였으며, 날밑은 금색으로 빛난다. 칼날은 대부분 녹슬었다. 전체길이 30cm이다.

화승총의 용두와 총알

화승총의 용두와 총알

용두는 화승총의 부품이다. 전국시대 후기에 출현한 화승총은 키사이성에서도 활약하였다. 총알은 납, 동, 철제로 출토된 약 100점 중 철제가 6점, 나머지는 동제와 납제가 반반이다. 용두의 길이는 10.5cm이다.

금화(금속생산의 소재?)

금화(금속생산의 소재?)

소판(小判, 일본에서 유통된 금화 형태)이 유통되기 전의 금화로, 무게로 가치를 매기는 평량화폐(秤量貨幣)이다. 히루모금(蛭藻金, 수초인 가래(히루모)를 닮은 금화)은 순도90%로 고순도이다. 히루모금과 키리금(切金, 필요에 따라 잘라서 사용한 금화)에는 금의 발색 상태가 좋도록 처리되어 있다. 히루모금의 길이는 4.8cm, 무게는 15.8g이다(1량 상당).

출전 : 일본 문화청 2023『발굴된 일본열도 2023 조사연구 최전선』 공동통신사